발칸반도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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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반도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비교적 생소한 여행지이다. 반도를 따라서 길게 디나르 알프스와 핀도스 산맥이 있는데 디나르 알프스는 ‘유럽의 마지막 황야‘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풍경이 그 별명에 딱 맞다는 인상을 준다. 우리나라 산들은 대체로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풍경이라면 이 지역의 산들은 석회암 기반이라 거칠고 뾰족하다. 사람이 없는 길에 혼자 이 지역 산지를 자전거로 달리고 있으면 때론 오싹한 기분마저 든다.

발칸반도에는 대표적으로 디나르 알프스 왼편 해안가를 따라 아테네로 향하는 유로벨로 8번 코스, 디나르 알프스 오른쪽 평야를 따라가는 유로벨로 11번 코스가 있다. 유로벨로 11번 코스는 진작에 오스트리아에서 경로를 바꿨기 때문에 가지 못하고 나는 주로 유로벨로 8번 코스를 따라가다가 중간중간에 스트라바 히트맵을 확인하며 내가 원하는 코스로 변경했다.

최근에는 Trans Dinarica라는 해외 사이트에 이 지역을 즐길 수 있는 바이크패킹 루트 gpx 파일을 유료로 파는데 돈도 돈이지만 이 루트는 고도 업 다운이 너무 심하고 와일드하다. 하루의 획득 고도가 기본적으로 1,500m가 넘는다. 그래블 코스도 많아서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 거 같았다. 게다가 보급도 힘들고 야생동물 리스크도 있다. 목적지가 아테네인데 이 길을 따라가면 아테네에 도착하게 되는 시간이 너무 늦어질 거 같았다. 하지만 여기 사이트에 들어가서 사진을 보면 그 아름다움에 혹하긴 한다.

발칸반도엔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가 한 군데도 없다. 그런데도 유로화 기반이라 그런지 물가가 꽤나 비싸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쪽 지역은 웜샤워 호스트가 거의 없다. 대화할 사람을 찾을 수 없어 외롭기도 하고 숙박과 식비로 돈을 꽤 많이 써야 한다.

발칸반도가 꽤나 야생일 거 같아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에서부터 대비를 했다. 물 때문에 고생하기 싫어서 좋은 정수필터가 달린 물통 그레일 울트라프레스 500ml라는 제품도 구매했다. 결론적으론 잘 한 선택이 된 거 같다. 집에 갈 날이 머지않았다는 생각에 여행 초반만큼 열정적으로 관광을 하지는 못했다. 여행 초반 뉴질랜드에선 유명하다는 등산 코스도 가보고 도시에서도 이곳 저곳 들렀는데 이상하게 여기선 그런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여행하면서 항상 느낀 거지만 감탄을 자아내는 풍경이 있는 곳은 사람이 살기 좋지 않은 곳이다.

COUNTRY 01

크로아티아 🇭🇷

Croatia
2025.05.22 ~ 2025.05.26 233.8 km
아름다운 해안선을 따라 오른쪽엔 절벽, 왼쪽엔 쌩쌩 달리는 차.
내륙으로 들어가자니 험한 산이 버티고 있다. 만만한 길이 없다.
Journey Timeline
크로아티아 구간
Croatia
Croatia · 2025.05.22 ~ 2025.05.26
2024.11.02 2025.06.21
🇭🇷 크로아티아

주로 해안가를 따라 달렸다. 유명한 관광지가 많아서 해안가 도로에는 교통이 많이 붐빈다. 매우 들쭉날쭉한 리아스식 해안이 압권이다. 압권이라 함은 경치도 압권이지만 그 위험성도 압권이다. 무지막지한 차량들이 나와 저전거의 왼편을 마구 스쳐 지나가는데 바로 오른쪽은 아드리아해 절벽이다. 내륙으로 들어가서 자전거를 타자니 디나르 알프스산맥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죽음의 이지선다이다. 산을 피하면 무서운 무서운 차량, 차량을 피하면 높은 산.

물가가 다른 서유럽 국가와 비슷하게 비싸다.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두브로브니크도 가는 길에 있었는데 마을로 들어가보지 못했다. 마을로 내려가게 되면 다시 엄청난 오르막을 올라와서 큰 도로로 합류해야 하기 때문이다. 멀리서 바라보는데 만족했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서유럽에서 계속 보던 사람들과 외모와 이미지가 비슷하다. 큰 차이가 하나 있다면 낯선 곳에서 만난 로컬 주민들이 다들 손을 높이 들고 인사한다는 점이다. 날씨도 좋아서 해안가 쪽을 여행하는 오토바이 여행자들도 많이 만났는데 오토바이 여행자들이 유독 따봉 인심이 후하다. 자전거 여행자를 보면 언제나 엄지를 추켜세워준다.

COUNTRY 02

몬테네그로 🇲🇪

Montenegro
2025.05.27 ~ 2025.05.30 255.7 km
자전거 친화적인 나라.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지구가 태어날 때, 육지와 바다의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몬테네그로의 해안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라고 극찬한 바 있다.
Journey Timeline
몬테네그로 구간
Montenegro
Montenegro · 2025.05.27 ~ 2025.05.30
2024.11.02 2025.06.21
🇲🇪 몬테네그로

자전거 친화적인 나라라 자전거 여행자들도 많고 자전거 길도 잘 정비되어 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지구가 태어날 때, 육지와 반다의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몬테네그로의 해안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라고 극찬한 곳이기도 하다.

그곳은 바로 코토르만. 살면서 이런 광경은 처음 봤다. 캠핑장에 가려고 자전거를 밟고 있는데 느닷없이 병풍같은 절벽이 나타났다. 나중에 알고보니 코토르만이었다. 꼬불꼬불한 헤어핀 길을 따라 열심히 산을 올라가면 장관이 펼쳐진다.

몬테네그로(Mont+Negro)는 그 자체로 검은 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이다. 어두운 침엽수림이 국토 대부분을 덮고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직접 보면 이해가 된다. 여기서부터는 드디어 식당 물가가 정상화된다. 서유럽이라면 기본 20-30유로씩 나올만한 식당이 여기서는 10유로 이하로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몬테네그로에서 부터는 식당을 꽤나 애용했다. 서유럽에서는 케밥집과 햄버거집을 제외하고는 멀쩡한 식당에 들어간 기억이 없다. 동남아를 포함한 개발도상국은 희한한게 물가가 싼 대신에 큰 마트를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돈을 아끼고 싶어도 아끼는 게 어렵다.

COUNTRY 03

알바니아 🇦🇱

Albania
2025.05.31 ~ 2025.06.07 432.4 km
유럽 여행지 중 가장 값싼 물가. 친근한 사람들,
낮은 도로 포장률, 농업과 관광업 중심적인 분위기로 인해
동남아의 이미지가 겹쳐보인다.
Journey Timeline
알바니아 구간
Albania
Albania · 2025.05.31 ~ 2025.06.07
2024.11.02 2025.06.21
🇦🇱 알바니아

나는 발칸의 국가들 중, 아니 유럽 전체 국가들 중에서 이 나라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물가가 싼것도 있지만 내 마음에 든 가장 큰 요소는 바로 이 나라가 가장 아시아 느낌이 났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농업이 GDP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2. 건물 외양이 베트남이나 태국 같은 개발 도상국과 비슷하다.
  3. 피부 톤이 다른 백인들과는 다르게 조금 어둡고
  4. 관광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5. 길에서 음식을 파는 사람도 많다.

이 모든 점이 맘에 들어서 알바니아에서 시간을 좀 많이 끌었다. 서유럽 사람들에게 알바니아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태국이나 베트남과 비슷한 포지션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저렴한 물가와 따뜻한 날씨, 곳곳에 있는 관광지들.

알바니아 사람들의 특징적인 점 하나가 기억에 남는다. 이들은 유독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 한번은 장난기 많은 아이들 여러 명이 제 자전거를 만지작거리기에 귀여운 마음에 사진을 찍으려 했는데, 그 순간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가 버렸다. 또, 한 시골길에서 만난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는 함께 사진을 찍기는 했지만, 절대 어디에도 업로드하지 말아 달라고 분명히 당부했다.

왜 그럴까? 과거 유럽의 북한으로 불렸던 만큼 독재국가의 잔재가 남아서일까, 아니면 관습법인 카눈(Kanun)이란 명예 문화의 영향일까? 흥미로웠다.

ChatGPT와 Reddit에서 본 정보로는 알바니아에서 개의 위협이 가장 심하다고 했다. 용맹스러운 양치기 개들이라서 태국의 개들보다 더 무서울 거라고 해서 들어가기 전부터 많이 쫄았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개의 위협을 받은 적이 없다. 오히려 그리스의 개가 더 사나웠다.

여행하면서 한국의 위상을 많이 실감했다. 알바니아는 한국 대사관도 없는 나라인데 곳곳에 태권도 도장이 있고 구글 지도를 켜서 보면 K-뷰티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South Korea에서 왔다고 하면 K팝, 페이커 등등 익숙한 이름들이 줄줄이 나온다.

COUNTRY 04

그리스 🇬🇷

Greece
2025.06.08 ~ 2025.06.20 664.5 km
한밤중 내 눈앞의 나무를 태워버린 제우스의 번개에 놀라고
아폴론의 태양에 고통받은 나라.
아테네로 향하는 길이 막혀 갈팡질팡할 때,
“My friend”라고 외치는 고장 난 오토바이를 탄 헤르메스가 등장했다.
그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Journey Timeline
그리스 구간
Greece
Greece · 2025.06.08 ~ 2025.06.20
2024.11.02 2025.06.21
🇬🇷 그리스

해안선을 따라 목적지인 아테네로 향하려고 했으나 유네스코 세계유산 ‘메테오라’수도원을 보기 위해서 내륙 산지로 들어갔다. 메초보산 꼭대기에서 여기가 왜 제우스의 나라인지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정상 부근 호수 근처에서 자려고 하는데 갑자기 미친 듯이 주위를 내려치는 벼락에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콰광 폭발음과 동시에 번쩍하며 번개가 300m 정도되는 언덕 위의 나무를 정통으로 강타해서 나무에 불이 붙었다. 늦은 밤에 그리스에서 소방차도 다 불러보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그리스 숙소는 비싸고 캠핑장은 없어서 여기저기서 와일드 캠핑을 했다. 발칸반도 사람들은 서유럽과는 다르게 와일드 캠핑에 관대하다고 한다.

노골적인 인종차별을 몇 번 겪었다. 예를 들자면 아테네에서 물류 운송센터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일하는 어른 한 분이 나를 자꾸 '치나'라고 불렀다. 차이나, 중국인이란 뜻이다.

서유럽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차별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의 시골 사람들은 애초에 그런 교육을 받지 못한 느낌이다. 하지만 전혀 악의가 느껴지지 않아서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다. 아마 우리나라 시골에 백인이나 흑인이 간다면 우리나라 시골 할아버지들이 그 사람들을 신기하게 여기고 때론 ‘코쟁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받은 느낌이 딱 그 정도였다.

최종적으로는 약 8개월 동안 약 12,000km 자전거를 타고 무사히 아테네로 잘 도착했다. 아테네에 도착해서 떠올린 에우메니데스에 나오는 구절로 내 마음을 대신하고 싶다.

6월 20일 에티오피아 항공을 타고 6월 21일 밤에 한국에 도착. 진짜 여행 끝

📘
아테나 여왕이여, 나는 록시아스의 명으로 여기 왔습니다.

그대는 이 탄원자를 호의로써 받아주소서. 하지만 나는 이미 정화가 필요하지도 손이 불결하지도 않나이다.

아니, 내 피의 얼룩은 남들과 함께 여행하고, 남들의 집을 방문함으로써 흐릿해지고 이미 닳아 없어졌습니다.

나는 육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고 떠돌아다녔으니까요.

록시아스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며 나는 그대의 집과 신상에 다가가고 있나이다, 여신이여! 나는 여기서 파수를 보며 재판의 결말을 기다릴 것이옵니다.

-에우메니데스,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