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뢰와 곰이 기다리는 유럽의 마지막 황야: 트랜스 디나리카의 유혹을 뿌리친 이유

[유럽 자전거 여행] #35 크로아티아 스플리트에서 발칸반도 횡단을 앞두고 거대한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잘 정비된 유로벨로(EuroVelo) 루트와 지뢰, 맹수, 살인적인 경사도가 공존하는 미지의 길 트랜스 디나리카(Trans Dinarica) 사이의 갈등.

Share
지뢰와 곰이 기다리는 유럽의 마지막 황야: 트랜스 디나리카의 유혹을 뿌리친 이유
⬅️ [이전 편] | 🏠 [전체 목록] | [다음 편] ➡️

2025.05.22-23

배에서 케빈을 신청하지 않아서 덱에서 노숙했다. 자리도 넓고 사람도 많이 없어서 꽤나 쾌적하게 잘 수 있었다. 아침 7시 크로아티아 도착. 오늘, 내일 비 예보가 있어서 이 도시에서 이틀간 호스텔을 예약해두었다. 하지만 호스텔 입실 시간이 오후 두시라 근처 카페, 맥도날드를 전전하며 한참 시간을 때웠다.

어제 배를 타면서 만난 독일인 자전거 여행자도 최종 목적지가 아테네라고 했다. 크로아티아 스플리트 근처 섬에서 이틀 정도 쉬다가 출발할 생각이라 했다. 아테네에는 자기 친구가 있어서 거기서 자고 친구가 공항까지 자전거를 싣고 태워준다고도 했다. 부럽다.

발칸반도를 자전거로 여행하는 공식적인 루트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전통의 강자 유로벨로
유로벨로 코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헝가리에서 세르비아를 뚫고 북마케도니아를 거쳐 그리스로 지나는 유로벨로 11번 코스는 내가 현재 있는 크로아티아 해안 스플리트와는 거리가 있다. 굳이 11번 코스로 가고 싶으면 악명높은 발칸반도의 디나르 알프스를 넘어가야 하는데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

디나르 알프스의 별명이 괜히 ‘유럽의 마지막 황야’인 것은 아니다. 이 산맥은 단순히 높은 산이 많은 곳이 아니라, 발칸반도 특유의 거칠고 메마른 카르스트 지형과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 드문 드문 있는 보급 지점, 예측하기어려운 날씨가 겹쳐져 쉽게 통과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지도 위에서는 그저 내륙으로 한 번 꺾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아니란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유로벨로 코스를 선택한다면 내 선택지는 해안가 도로, 지도상으로 갈색길인 유로벨로 8번 코스다.

  1. 신흥강자 Trans Dinarica
Trans Dinarica Online Shop
Explore the Trans Dinarica online shop for navigation packs covering the entire cycling route or individual countries. Get your GPX files, maps, and exclusive Trans Dinarica merch—cycling apparel, hats, and more.

이 녀석은 훨씬 더 힘들다. 게다가 GPX 지도 파일을 다운받는데 돈을 지불해야한다. 지도에 표시된 길 전체를 다운받으려면 193유로를 내야한다. 보통 내가 하루에 100km를 탄다고 했을 때 오르막이 좀 많다했던 지역에선 하루 획득고도가 1,200m 정도 찍힌다. 태국 중남부나 캄보디아, 유럽의 도나우강을 따라가는 평지 루트는 하루에 100km를 타도 획득고도가 100m가 안될 때도 있다.

하지만 여기 Trans Dinarica 루트는 평균잡아 50km 가는데 획득고도가 1,000m 정도 된다. 포장이 되어있지 않은 구간도 많아서 체력적으로 매우 힘들것이다.

체력만이 문제가 아니다. 몇 가지 문제가 더 있다.

  1. 보급문제: 하루종일 식당이나 가게를 못 만날 수도 있다. 많은 양의 물과 음식을 가지고 다녀야한다.
  2. 산 깊숙이 들어간다. 오지에선 인터넷이 잘 안돼서 조난 위험이 있다. 계획을 촘촘히 세우지 않으면 수없이 많은 와일드캠핑을 감내해야한다.
  3. 곰, 늑대, 멧돼지가 있다. 실제로 만나지 않더라도 이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전거를 탈 때는 캠핑을 할 때든 심리적 스트레스를 강하게 준다. 양치기 개들도 있는데 매우 사납다고 한다.
  4. Trans Dinarica 홈페이지에도 공식적으로 안내하고 있는 말인데 지뢰 위험이 있다. 이 루트로 따라다니면 실제로 지뢰 조심 표지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출처: Trans Dinarica, “What’s the situation with mines along the Trans Dinarica cycle route?”

발칸반도를 여행한 한국인 후기나 유튜브 영상은 많은데 아직 Trans Dinarica를 여행했다는 한국인은 보지 못했다. 나는 항상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좀 과하게 걱정하는 편이다. 항상 실행에 옮겨보면 내가 과도하게 걱정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말이다.

결론적으로는 트랜스 디나리카는 포기했다. 지금으로서는 유로벨로 8번 코스를 기반으로 마음가는대로 좀 변형시켜서 여행을 할까 한다.

크로아티아는 GDP의 25% 정도를 관광산업에 의존한다고 한다. 스플리트도 그 관광산업의 핵심 도시라 관광도시의 느낌이 물씬 난다. 여기 호스텔에 머무는 사람도 대부분 서유럽에서 크로아티아로 놀러 온 젊은 사람들이었다.

나는 이 호스텔에서 이틀간 그저 푹 쉬려고 왔는데 여기 머무는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격이 싼만큼 공용 공간도 지나치게 좁아서 있을 만한 곳이 침대 뿐이었는데 친구들끼리 함께 온 사람들이 시끄러워서 스트레스를 꽤 받았다. 20살, 21살 처음 서울로 올라갔을 때 공용 기숙사 살 때의 그 스트레스. 내 삶의 리듬과, 같이 생활하는 사람의 리듬이 크게 차이날 때 오는 바로 그 스트레스를 오랜만에 느꼈다.

여행을 하면서 여행을 그만두고 싶어지는 순간은 자전거가 아닌 교통수단을 타고 먼 거리를 이동했을 때다. 뉴질랜드에서 방콕, 하노이에서 바르셀로나, 오늘 처럼 이탈리아 안코나에서 크로아티아로 넘어 왔을 때. 자전거로만 이동하면 공간의 단절이 생기지 않아서 그 공간의 분위기를 서서히 적응해나갈 수 있는데 반해 비행기나, 장거리 배로 이동해버리면 마치 순식간에 고도가 상승한 사람이 고산병을 앓는 것 처럼, 그 분위기에 쉽게 적응이 안된다. 이 전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적응할거라고 믿는다.

⬅️ [이전 편] | 🏠 [전체 목록] | [다음 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