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나 여왕이여, 나는 록시아스의 명으로 여기 왔습니다.
[유럽 자전거 여행] #54 2025.06.16
2025.06.16
아테네를 향해 출발한다. 아테네로 가면서 느낀 점은, 고대 그리스에 다른 도시 국가들이 아테네를 침략하기가 참으로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 바로 뒤에 Parnitha라는 큰 산이 버티고 있고(오늘 넘은 산), 바로 앞으로는 바다이기 때문이다. 오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자전거도 꽤 오래 탔다. 1,231m의 고도를 올랐고 107km를 이동했다. 가는 길에 목이 엄청 마르고 배가 고팠는데 아테네로 진입하기 전까진 마땅히 먹을만한 곳도 없었다. 정상에 올라 아테네 풍경을 바라보니 장관이다. 탁 트인 평원에 건물들이 빼곡하게 차있다. 아마 내 유럽 자전거 여행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시인듯 싶다.




마땅한 호스텔이 없어 오늘 저렴한 에어비앤비를 하나 예약해놨다. 집 주인과 함께 공간을 공유하는 형태의 진짜 에어비앤비. 이제껏 어디에서도 숙소 예약 후에 연락을 하면 자전거 보관할만한 곳 하나 쯤은 있기 마련이었는데 이번 주인은 상당히 깐깐하다. 자기 집에는 보관할 곳이 절대 없고 밖에 놔두면 도난당한다며 자기는 절대 책임 못 진단다. 그래도 그 정도 가격이 되는 저렴한 숙소가 없어 뭔 수가 있겠지 싶어서 그냥 예약을 진행했다.
높은 산을 넘어서 마침내 아테네에 도착했다. 여기서 이틀 전 테르모필레 전투 지역을 보고 느낀 실망의 감정을 또 느꼈다. 우리는 실제 대상과 장소를 욕망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장소에 붙은 기호, 이미지, 이름, 아우라를 먼저 욕망한다. 아테네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아우라가 어찌나 대단한지, 실제 아테네에는 아테네가 없다.
"아테네”라는 이름, 역사, 철학, 고대 문명, 사진, 관광 이미지, 서양고전의 아우라 때문에 내 머릿 속에는 아테네의 이데아가 하나 생겼다. 그래서 실제로 도착했을 때 내가 만나는 것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현대 도시인데도, 나는 자꾸 그 위에 내가 상상해온 아테네를 겹쳐 본다. 나의 실망은 도시 자체에서 생겨난다기보다, 현실보다 훨씬 앞서가 있던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생긴다.
장보드리야르의 언어로 말하자면
지도가 영토보다 먼저 온다.
나는 실제 아테네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수많은 이미지와 이름과 상징으로 만들어진 ‘아테네의 지도’ 속에서 먼저 그 도시에 도착해 있었던 셈이다.
에어비앤비 입실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파르테논 신전을 보러갔다. 하지만 여기는 지금 수리중이다. 도리스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의 아름다움의 절정, 아테네의 힘과 영광을 과시하는 파르테논 신전이 지금 현대 철근에 의해서 유린당하고 있었다. 또 한번 실망하는 순간이다.






프루스트는 발베크의 성당의 성모상을 보며 나와 같은 종류의 실망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을 했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마르셀 프루스트
대충 중요 건물들을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와서 주인에게 연락했다. 주인이 말하길 건물 안에 지하실에 공간이 있는데 아테네에는 도둑들이 들끓는다며 훔쳐가도 자기는 절대 책임 지지 않는다며 정색한다. 이미 본인도 자전거 두대를 도난당했다고 한다.
도난 경보 장치가 있으니까 걱정없겠지. 19일 밤 늦게 공항으로 가서 20일 새벽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야한다. 여기서 3일 동안 꼼짝없이 쉴 생각이다. 여행의 마무리라고 생각하니 의욕도 없다. 그저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다.

그대는 이 탄원자를 호의로써 받아주소서. 하지만 나는 이미 정화가 필요하지도 손이 불결하지도 않나이다.
아니, 내 피의 얼룩은 남들과 함께 여행하고, 남들의 집을 방문함으로써 흐릿해지고 이미 닳아 없어졌습니다.
나는 육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고 떠돌아다녔으니까요.
록시아스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며 나는 그대의 집과 신상에 다가가고 있나이다, 여신이여! 나는 여기서 파수를 보며 재판의 결말을 기다릴 것이옵니다.
-에우메니데스,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