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하고 밍밍한 여행의 끝

[유럽 자전거 여행] #55 2025.06.17 -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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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하고 밍밍한 여행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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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7

자전거를 포장해서 공항까지 어떻게 가야하는지 알아봐야한다. 19일까지 할 일은 이것 뿐이다.(19일 밤에서 20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비행기를 타야한다.) 돈을 아끼려고 에티오피아 항공을 예약해놨는데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경유해서 하루를 쉬고 간다. 에티오피아 항공은 경유시간이 일정 이상 되면 꽤 괜찮은 호텔과 식사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한다. 근데 문제는 자전거 포장 규격이 꽤나 까다롭다는 점이다. 다른 항공사들은 포장 규격이 널널해서 자전거를 포장하고 빈 공간에 내 짐들을 전부 때려넣어서 박스 하나로 만들었었다. 하지만 여기 규정에 따르면 자전거만 넣어도 간신히 통과할 크기이다.

어찌됐건 내 자전거 가방의 짐들도 한 곳에 넣어야 한다. 박스를 두개 구하기보다는 큰 헬스가방 같은걸 하나 구할 생각으로 데카트론에 가서 55L 짜리 큰 가방을 하나 구했다. 정들었던 개 처치 막대기도 가져가고 싶었지만 공간이 남지 않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근처 자전거 가게로 가서 물어보니 적당한 가격에 자전거 포장을 해준다고 했다. 본인 친구가 택시기사인데 택시 기사도 시간에 맞춰서 불러준단다. 가격도 적당하다. 택시비를 10만원 정도를 예상했지만 3만원 정도 선에서 끝났다. 포장비도 약 3만원 정도 였다.

모든 준비가 다 되었고 19일까지 쉬는 일만 남았다.

여행의 막바지에는 늘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직장인들이 금요일에 기분이 가장 좋고 일요일 오전부터 감정적으로 월요일이 미리 시작되는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이미 나는 작은 에어비앤비 방에 틀어박혀 현실을 살고 있다. 여행이 끝난 후에 어디서 일할 지를 생각하고 앞으로의 내 생활비를 계산하고 있다.

여행의 끝이 이토록 초라하고 행정적이며 시시하고 밍밍할 줄 몰랐다. 레퀴엠이나 장송곡처럼 엄숙하고 비장할 줄 알았다. 230일이 넘는 여행의 끝에 나오는 음악은 공연이 끝나고, 객석에 불이 켜지고 나오는, 관객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갈 때 어색하지 않게 연주해주는 퇴장음악 같았다. 의자 끄는 소리, 헛기침하는 소리, '밖에 나가서 뭐 먹지?'라고 하는 관객들의 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


2025.06.18

아찔한 일이 일어났다.

  1. 유럽에서 집 열쇠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했고,
  2. 도둑들은 어디에나 들끓는다는 사실도 간과했다.

물리적인 열쇠가 익숙치 않아서 무의식적으로 에어비앤비 방에 들어올 때 문 바로 밖에 꽂아두고 들어왔다. 약 10분 뒤 그걸 깨닫고는 문 밖에 키 꽂는 곳을 확인했지만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새 누가 훔쳐가버린 것이다. 진짜 이상한 것은 여기는 원룸 건물 같은 곳인데 건물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공동 현관 키가 필요하다. 그렇다는건 이 건물 안에 사는 사람 혹은 배달원, 수리기사가 그 짧은 시간에 열쇠를 훔쳐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유럽 여행을 할 때 열쇠를 잃어버려서 수십 수백만원의 배상금을 물어주었다는 괴담이 인터넷에 많다. 나는 지금 공동 현관 키 까지 같이 털렸기 때문에 만약 집주인이 여기 사는 모든 사람들의 문 열쇠꽂이를 바꿔야 한다고 하면 진짜 수백만원대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다. 식은땀을 흘리며 호스트에게 말하니 그냥 본인 현관 문 열쇠꽂이만 바꾸자고 한다. 5만원 날렸다. 불행 중 다행이다.

열쇠 도난 사건은 일단락 됐고 나는 자전거 가게에 들러서 자전거를 전부 포장하고 자전거 가게 창고에 보관해놨다.

아테네는 특이하게 동남아의 여느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더운 날씨와 개발 도상국 특유의 낡은 콘크리트 건물. 무질서함과 오토바이들.


2025.06.19

떠날 일만 남았다. 아테네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그냥 남들 가는 곳을 정처없이 걸어다니다가 자전거를 찾아 택시를 타고 비행기를 탔다.


2025.06.20

아디스아바바에서 10시간 정도를 대기하고 한국으로 날아갔다. 이제 진짜 끝이다.


2025.06.21

한국으로 날아오면 나는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고 대구로 내려갈 계획이었다. 그래서 도착지도 인천공항으로 찍었다. 하지만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굉장히 사소한 이유때문에 자전거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타고 내려가기로 결심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고향에 무사히 돌아왔고 친구들과 부모님의 환영을 받았는데 무감각하다. 군대 첫 휴가를 받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가 전역 후에 돌아왔을 때보다 훨씬 더 기쁘고 감격이 컸었다. 지금 딱 그런 느낌이다.

피로감과 공허함.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여행의 과정 속에서 받을 수 있는 축복을 거의 다 받아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치 이삭이 야곱에게 할 수 있는 축복을 먼저 다 해버린 뒤 에서에게는 남길 말이 별로 없었던 것처럼. 이 긴 여행도 마지막에 이르러 내게 따로 건네줄 감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나보다.

집에 오자마자 한국 음식을 폭풍 흡입해서 배탈이나서 이틀 앓았다. 여행 중에도 한번도 배탈이 나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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