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초의 생사, 눈앞에 꽂힌 벼락: 살고 싶어 웅크렸던 비명의 밤, 나무가 타오르다

[유럽 자전거 여행] #48 2025.06.10 해발 1,350m 메초보 산 정상, 피뢰침 하나 없는 정자 옆에서 낙뢰와 마주한 자전거 여행자의 생존 기록입니다. 불과 200m 거리에서 나무를 집어삼킨 벼락의 공포와 ChatGPT에 의지해 떨며 버틴 긴박한 사투, 그리고 독일인 노부부와 함께한 필사의 화재 신고 현장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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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초의 생사, 눈앞에 꽂힌 벼락: 살고 싶어 웅크렸던 비명의 밤, 나무가 타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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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6.10

여기서 메테오라로 가기 위해서는 큰 산을 하나 넘어야한다. 쉽게 비유하자면 경상도에서 소백산맥을 넘어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느낌이라고 보면된다. 일반적으로 자전거 여행을 한다면 경상도에서 밑으로 자전거를 밟아서 부산으로 내려가지 뜬금없이 대구에서 광주로 향하지는 않는다. 결을 거스르는 진행방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꼭 메테오라 수도원을 가고싶기 때문에 큰 산을 하나 넘기로 마음먹었다.

Metsovo 산 정상 부근, 해발고도 1350m 정도에 Aoou라고 하는 호수가 하나 있다. 그 곳에 정식 캠핑장이 아닌 캠핑장이 있다고 한다. 어찌됐건 거기까지 한번 올라가보자.

시작부터 이오아니나에 있는 큰 호수인 팜보티다 호수를 끼고 돌면서 올라가기 시작한다. 산악지역의 좋은 점은 물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물은 용기의 다른 이름이다. 난 지금 멋진 정수기 필터가 달린 물통을 가지고 있는데 얼마나 마음이 든든한지 모른다. 언제 어디서든 물만 보이면 떠마실 수 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물도 흐르기만 하고 부유물만 없다면 정수해서 마시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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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거리 여행에서 ‘물’은 왜 리스크가 되는가 장기간 야외에서 생활하거나 여행 기간이 길어지면 마실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물과 마주한다. 냇물, 호수물, 수돗물, 생수, 흙탕물, 심지어 화장실 물이나 수원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물을 마셔야 하는 순간도 있을 수 있다. 여행자 설사는 대개 물이나 물로 씻은 음식에 의해서 발생하는데 물만 조심해도

​자전거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그 수많은 짐들을 신경쓰면서 다니면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평소에 팔이 잘 달려있나 다리가 잘 달려있나 확인하지 않듯이 이미 내 짐들은 내 수족이 되어있기에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신기한 일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오르막길. 열심히 올라가는데 날씨가 조금 이상하다. 산지라 그런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조금 내린다. 그래도 폭풍이 오는 날씨는 아니라서 목적지까지 계속 달려나갔다.

앱에 표시된 위치로 가보니 캠핑카가 몇 대 보인다. 이런 곳에서 사람의 흔적이라도 조금 보이면 안심이 되는 법이다. 정자 옆에 자전거를 위치시키고 호수가로 내려가서 샤워를 했다. 호수의 물도 여러번 정수기 필터로 떠다 마셨다. 불도 피우고 음식도 먹으면서 한참을 쉬었다.

​자려고 하는데 날씨가 심상치않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 연이어 천둥 번개가 마구 내리친다. 번개가 내리치고 우레소리가 들리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으로 번개가 내리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초반에는 10초 정도 뒤에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소나기가 거세지면서 기어코는 번개가 친 직후 1-2초 안에 천둥 소리가 천지 사방을 진동시키기 시작한다.

머릿 속을 스쳐가는 생각은 단 하나 뿐.

죽을 수도 있겠다.

내가 있는 곳은 이 근방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근처에 전신주가 몇 개 보이고 작은 둔덕 같은 것이 하나 있긴 한데 그걸 제외하면 고도로 따졌을 때 내가 있는 곳에 번개가 바로 내리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내 텐트는 정자 바로 옆에 있는데 정자가 피뢰침 같은 역할을 할 가능성도 분명 있다. 텐트를 옮기자니 소나기가 너무 거세서 텐트를 옮기다가 몸이 젖어버리면 위험도는 더 올라갈 수도 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캠핑카는 번개를 직접 맞아도 전류가 금속 차체를 따라 땅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아웃도어 활동에서 번개가 내리칠 때 30-30 법칙이란 것이 있다.
번개가 번쩍 → 천둥 소리가 들릴 때까지 30초 이하라면 번개가 매우 가까이 있음 → 즉시 대피해야 한다
천둥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은 시점부터 30분 동안 더 이상 천둥이 들리지 않아야 야외 활동 재개 가능

하지만 나는? 번쩍! → 1초 뒤에 우르르르르릉.

믿을 건 ChatGPT 뿐이다. GPT가 시키는대로 텐트를 빠져나와 정자 밑에 절연이 될만한 비닐 같은 것을 여러개 깔고 두 발을 모으고 웅크리고 떨면서 한참을 있었다. 정자가 번개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어도 충격을 받고 이명이 들릴 정도가 가장 좋은 시나리오고 아니면 감전이나 화상을 입을 수도 있단다.

Safety Guidelines: Lightning
Take steps to protect yourself and others when there is lightning.
미국 CDC(질병통제예방센터)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이런 상황에서는
When thunder roars, go indoors:
바로 실내를 찾아 들어갔어야했다. 천둥 소리가 저렇게 들림과 동시에 옆에 있는 노부부 캠핑카로 바로 뛰어가서 살려달라고 빌었어야했다.

번개 간격이 1-2초 수준에 수백미터 근처에서 번개가 치고 있었는데 나에게 안전한 선택지는 없었다. GPT가 저때는 웅크린 자세 덕에 만약 정자에 낙뢰가 꽂혀도 치명상은 피할 수 있다고 했었지만 현재 CDC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저 말도 아무 근거가 없다. 그냥 나는 죽음의 문턱에 있었다.
-2026.06.10

​한참을 떨면서 있던 와중에 시야 바로 옆에서 폭탄소리와 함께 낙뢰가 바로 옆 둔덕으로 내리꽂는 것을 목격했다. (!!??) 끽해봐야 200m가 안되는 곳임이 분명했다. 몇 분 뒤에 그곳에서 붉은색이 아지랑이 처럼 보이길래 핸드폰 야간모드로 촬영을 해봤다. 불이다. 나무가 번개에 맞아서 불이 붙었다. 제우스의 나라는 달라도 뭔가 다르다.

요며칠 이 부근이 건조했는지 습했는지 알 길은 없다. 확실한건 시간이 지날수록 불이 커진다. 옆에 있는 캠핑카 주인이 그리스인이겠지? 그리스어를 수월하게 할 수 있어서 119에 신고를 나보다 잘하겠지? 하는 마음에 다급하게 옆 캠핑카로 뛰어가 문을 두드렸다.

노부부가 의심의 눈초리를 잔뜩 보내며 나를 경계한다. 하지만 내 다급한 인상을 보고는 문을 열어주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독일인 노부부인데 어쨌든 그 분들이 119에 화재신고를 대신 해주었다.

밤 늦게 소방차들이 도착을 했고 다행히 불이 옆 나무로 번지진 않았다. 나는 구급차를 보고서는 비로소 잠에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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