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 오자마자 75만원짜리 텐트를 잃어버렸다.
[유럽 자전거 여행] #02 2025.04.06 스페인 자전거 여행 이틀차. 행방불명된 텐트.
2025.04.06
침낭이 약간 젖어있어서 12도 정도였는데도 잘 때 추웠다. 앞으로 가는 길에는 영상 5도 밑으로 내려가는 곳도 많은데 좀 걱정이 된다.

이틀 밖에 안되었지만 유럽 사람들이 뉴질랜드 사람들과 확실히 다르다는 건 알겠다. 뉴질랜드 사람이 좀 더 개방적이고 친근했다면 여기 사람들은 무관심한 느낌이 있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캠핑장 비용이 비싸니까 고민이 많아졌다. 계속해서 4만원씩 내고 캠핑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무래도 와일드캠핑과 캠핑장 이용을 번갈아가면서 해야될 듯하다. 내가 지금 달리고 있고 달릴 예정인 스페인 남부, 프랑스 남부 쪽에는 위험한 동물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와일드 캠핑을 하는데 큰 위험이 없을 거 같다.
가는 길에 독일 젊은 청년을 한 명 만났는데 이탈리아 로마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잠은 어떻게 자냐고 물었더니 대체로 와일드캠핑을 한다고 했다. 캠핑장이 이렇게나 비싸다면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오늘 아침 텐트를 다 말리지 못하고 출발을 해서 중간에 양지바른 곳에서 텐트를 말리면서 좀 쉬고 다시 출발했다. 한 15km 정도 갔을 때, 문득 텐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텐트를 핸들바 앞에 매달고 다녀서 원래 텐트가 없으면 본능적으로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누가 훔쳐가지만 않았다면 평소 같았으면 절대로 텐트 없이 출발 할리가 없다. 하지만 한달넘게 다낭에서 있으면서 자전거에 짐을 매달지 않고 다녔기에, 텐트가 없는 자전거 핸들바가 내 눈에 익어버렸다. 그래서 그 상태로 한시간 넘게 자전거를 탔던 것이었다. 목이 말라, 텐트 앞에 묶어둔 물을 마시려고 했을 때 그제서야 텐트가 없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머리가 하얘졌다.


여행 중 머리가 하얘진 경험이 오늘을 포함해서 딱 세번 있는데, 라오스에서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다시 찾았다.), 베트남에서 소시지 가게에 핸드폰을 놔두고 왔을 때(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다.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는 워낙 도난에 안전해서 아마 그 상태로 하루나 이틀동안 있었어도 안전하게 되찾을 수 있었을텐데, 여기는 악명높은 유럽아닌가. 머리가 하얘진 채로, 그 위치를 향해서 달렸다. 다행히 그 위치에서 쉴 때 사진을 찍어놨는데 자동으로 위치 메타데이터가 저장되어 있어서 쉽게 그 위치를 찾을 순 있었다.

죽어라 한시간 자전거를 밟아서 갔는데 웬걸, 내 텐트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있다. 그 옆에 놔둔 1.5L 생수통도 없어졌다. 대신 공터에는 노래를 크게 틀고 춤추고 있는 젊은 남녀 커플이 보인다. 그 사람들은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해서 겨우 번역기를 통해서 소통을 하는데 마음이 급해서 자꾸 오타가 난다. 그래도 자기 일처럼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 그런 식으로 놔두면 100% 누가 훔쳐가거나 경찰이 와서 가져간다고 했다. 근처 경찰서 위치도 상세히 알려주면서 거기로 가보란다. 근데 만약 도둑이 가져갔다면 1.5L짜리 페트병도 가져갈까? 이상하지 않은가?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서 경찰서 방향으로 향하는데, 아까 올라오면서 본 근처에 쓰레기통이 기억났다. 경찰서 방향과 같은 방향이다. 쓰레기통 바로 옆에 내 텐트가 고이 놓여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풋프린트, 텐트 스킨, 플라이까지 고이 접어 텐트 가방에 담아서 버려놨다. 세상에나 이런 기적이 있나. 나는 희한하게 이런 운이 참 좋다. 한시간을 넘게 여기로 되돌아오면서 만약 누가 훔쳐갔다면 어떻게 해야되나라고 생각하면서 달려왔다. 풋프린트까지하면 75만원짜리 텐트다. 오프라인 매장은 근처에 없을 것이고 똑같은 텐트를 사기 위해서는 아마 배송기간 며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배송기간 동안에 근처 숙소비를 계산하면 거의 100만원을 써야지 내 텐트를 다시 손에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 정말 잃어버렸다면 근처 캠핑매장에서 저렴한 텐트를 구매하지 않았을까 싶다. 텐트 없어졌다고 집으로 되돌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다시 달렸다. 날씨가 기가막히고 풍경이 예술이다. 만발한 유채꽃(처럼 보인다.)이 어찌나 예쁜지. 동남아의 풍경과 180도 달라졌다. 논밭, 숲, 오솔길, 작은 마을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런 길에서는 어디든 와일드 캠핑할 수 있는 곳이 널렸다. 동남아에서 만난 유럽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용감하게 와일드캠핑을 하는지 궁금했는데 오자마자 그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이미 이 사람들은 자연을 놀이터처럼 살고 있었다. 나는 등산 경험도 많이 없고 아웃도어 활동이 익숙지 않아서 나에게 산, 숲, 강은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 지 모르는 무서운 미지의 세계였다. 하지만 어릴 때 부터 유럽 사람들은 자연에서의 삶과 아웃도어 활동에 익숙해져있다.






Girona 라는 도시 중간에 큰 공원이 있길래 거기서 잘 수 있을까 싶어서 갔는데 생각보다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안되겠다 싶어서 도시외곽으로 가다가 밀밭인지 보리밭인지 뭔가 보이길래 안쪽에다 텐트를 쳤다. 가지고 있는 물로 머리도 감고 세수도 했다.
도로에서 적절하게 가려져 있어서 똥휴지, 콘돔 등 희한한 게 많이 발견된다. 곧 해가 지기 때문에 똥오줌 가릴 처지가 못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