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에서 순례자로: 몽트뢰의 경고음이 깨운 내면
[유럽 자전거 여행] #14 2025.04.21 몽트뢰 마트 앞에서 자전거가 사라진 순간, 해방감과 족쇄라는 이중적 감정을 목격합니다. 아테네까지 가야 한다는 '선언'의 무게를 견디며, 3도의 강추위 속 뜨거운 돌멩이를 침낭에 넣고 버티는 자전거 여행자에서 순례자로의 변화
2025.04.21
하루를 침대에서 자면 이틀은 와일드캠핑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캠핑장과 와일드 캠핑의 난이도를 비교하자면 단연코 와일드캠핑이 절대적으로 힘들다.
보통 나는 5시 부근에 목적지에 도착을 하는데 캠핑장에는 도착하자마자 바로 텐트를 치고 씻고 음식을 먹은 후 텐트 안으로 들어가서 자면 그만이다. 하지만 와일드 캠핑(진짜 야생의 와일드캠핑이 아니라 마을 근교에서의 노지캠핑을 말하는 거다.)을 할 때는 장소 물색의 어려움을 차치하더라도 보통은 해가 질 무렵인 저녁 8시까지 기다리면서 눈치를 봐야한다. 제대로 씻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쫒겨나지 않을까 하는 심리적 부담도 있다. 그래도 아무도 없는 산이나 들에서 혼자 잘 때의 무서움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가족들과 함께 빵을 먹고 출발했다. 유럽사람들과 밥을 먹을 땐 항상 내 서툰 나이프, 포크질이 부끄럽다.
아침부터 비가오고 춥다. 자전거 여행만큼 날씨를 정면돌파하는 여행이 또 있을까. 너무 춥고 힘들다. 다시, 너무 춥고 힘들다. 한참을 가다보니 내가 아까 길에서 방수 바지로 갈아입으면서 길바닥에 샌들과 물통을 놔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까지 많은 것을 잃어버려왔는데 항상, 이걸 버릴까 말까 고민하던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만큼 그 물건에 대한 주의 집중력이 떨어졌다는 것이겠지.
그것을 찾으러 가려면 한시간을 뒤로 갔다 와야해서 총 2시간을 날리게 된다. 그러면 오늘 내가 미리 찾아놨던 와일드캠핑 장소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고 만약 겨우 도착하더라도 그곳에 적절치 않은 장소일 경우 다른 캠핑장으로 이동할 여유가 없을 것이다. 여러모로 보나 감가상각이 되어서 현재가치 만원도 하지 않을 샌달을 찾으러 뒤로 되돌아갈 바에 그냥 직진 하는 것이 옳다고 결론 내었다.




스위스 몽트뢰(Montreux)에 있는 마트에서 물과 콘센트어댑터를 살 겸 들렀다. 자전거를 세워놓을 공간이 마땅찮아 건물 내부에다가 자전거를 세워놨었는데 물건을 사고 돌아오니 자전거가 행방불명 되었다. 내 자전거는 누가 훔치려고 하면 아주 시끄러운 경고음을 내는데 그래서 나는 웬만해선 자전거를 굳이 자물쇠로 잠그지 않는다. 경고음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근처를 다 돌아다녀봐도 자전거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그때 주변에 경고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자전거 안에 심어둔 위치추적기를 살펴보아도 이 근처에 있다. 지나가는 스위스 사람 한 분을 붙잡고선 내 상황을 설명하니 도와주셨다. 슈퍼 직원에게 내 상황을 설명하는데 그 때 한 건물 관리 요원이 다가와서 나보고 자전거 주인이냐고 물었다. 자전거를 건물 안에 세워두면 안돼서 밖에 세워두었다고 한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도와주신 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후 다시 안장에 올랐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귀청이 떨어져나갈 거 같은 데시벨의 무자비한 경고음을 들으면서 자기가 맡은 바를 그렇게 융통성 없이 하는 스위스인 건물 관리 요원이 참 미웠다. 이 무자비한 철두철미함 때문에 아직도 바티칸 교황청에서는 스위스 용병을 쓰고있나보다.
참 이상한게 너무 춥고 힘드니까 자전거가 사라지면 그냥 체념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마음 한켠에는 내 자전거를 되찾고 싶다는 의지(자전거 + 캠핑장비 + 노트북 등등) 그리고 다른 한켠에는 족쇄가 풀리고 해방되는 느낌이 동시에 들었다.
나는 이미 내 말에 묶여버렸다. 여행을 처음 계획할 때, 유럽을 끝까지 가보겠다고 다짐했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선언은 일종의 족쇄가 되어서 나를 포박했다. 쓸데없이 강한 책임감이 자유롭자고 한 여행조차 의무로 바꿔버렸다.
순간이지만 자전거를 잃어버리니 내 마음이 선명히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테네까지는 갈 거다. 만약 여기서 포기한다면 미완에 결론 앞에 한평생 우물쭈물 살게 될 것만 같았다. 어느 순간이라고 딱 자르지는 못하겠지만 나는 어느 시점부터 여행자에서 순례자로 넘어간 것 같다.
(작년 11월에 남겼던 게시물)


내 여행이 막을 내리는 줄 알았다.
산과 언덕을 열심히 넘은 후에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와서 피크닉도 하고 여름에 물놀이도 즐길 수 있는 좋은 장소였다. 무엇보다도 안심이 되는 건 곳곳에 불을 피운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미 많은 사람이 여기서 캠핑을 했다는 뜻이니까.




해가 지길 기다리며 라면을 끓여먹고 오늘 밤의 강추위(3도) 대비를 했다. 침낭과 외투를 바싹 말리고 근처에 돌맹이들을 주워서 반합에 넣어 끓였다. 따뜻한 돌맹이가 있는 반합을 침낭 발치에 넣으면 몇시간은 따뜻할 것이다.
실내에만 생활하는 사람은 봄 밤의 추위를 가늠하지 못한다. 낮에 해가 떠있으면 그저 따뜻하기 때문에 그만큼이나 일교차가 크다고 생각 못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밤과 아침에는 엄청 춥다. 비가오고 바람이 오면 더더더욱 춥다.
새벽에 너무 추웠다. 아무래도 장비 보강이 필요할 듯 싶다. 핫팩이 있으면 좋을텐데.
내 매트리스는 이론상 0도가 한계온도이고 내 침낭은 -2도가 컴포트 온도인데 너무 추웠다. 다리 쪽이 시리고 매트리스의 부피가 거의 반으로 줄은걸로 봐서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매트리스가 제대로 막지 못하는 거라고 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