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명의 검은 사제들 사이에서: 프라글리아(Praglia) 베네딕토 수도원의 침묵
[유럽 자전거 여행] #31 2025.05.16-17 이탈리아 파도바 인근의 프라글리아(Praglia)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이틀간의 '강제 휴식'을 가집니다. 알프스를 넘으며 억눌러왔던 몸살 기운이 지중해의 온기 속에 터져 나온 순간, 검은 사제들의 침묵 어린 식사와 고요한 기도 소리. 뜨거운 웜샤워와는 또 다른, '무심하고 차가운 환대'를 느낍니다.
2025.05.16
아침이 되니 호스트 아주머니가 수도원의 돈 루이지 신부님(Don이 신부님, 주교님이란 뜻이라서 돈 루이지 신부님이라고 하면 중복표현이 되는데 이게 자연스러워서 이렇게 쓰겠다.)과 연락을 했는데 수도원에서 자도 된다고 하셨다. 정원에 텐트를 치고 잘 필요도 없고 수도원 안에 게스트룸을 내어주신다고 했다.
파도바에는 조토가 그린 ‘성모 마리아의 생애’ 프레스코화 연작으로 유명한 스크로베니 예배당이 있는데 이 곳은 미리 예약을 해야만 갈 수 있어서 대신 산조반니 세례당을 구경했다(유료).





세례당 밖에 광장으로 나와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 있으니 극심한 피로를 느껴서 광장에 의자를 펴놓고 한참을 쉬었다. 여기서 15km 떨어진 곳에 수도원이 있는데 오후 2시쯤 돈 루이지 신부님이 나를 기다리신다고 하여서 더 오래 쉬지는 못하고 수도원으로 갔다.

피정 신청은 여기서 하면 되는거 같다.
수도원을 관리하는 분에게 내 이야기를 전하고 돈 루이지 신부님을 만났는데 큰 키에 무표정한 얼굴. 순간 장미의 이름에서 나온 13세기의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도사가 살아서 내 앞에 나타난 느낌을 받았다. 일부러 정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랜 수도생활 끝에 웃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과 같은 느낌이었다.(가끔씩 아주 어색하게 짧게 웃곤 하셨다.). 이 정도로 어색한 표정의 웃음은 우리나라에선 보통 수년간 사람을 만나지 않고 피시방에서 게임만한 사람에게서 가끔 찾아볼 수 있는 종류의 웃음이다.
나를 게스트룸으로 안내해주시고 잠깐 아침, 저녁, 예배당 위치를 소개해주셨다. 오후 3시반, 4시반에 이탈리아어로 수도원 구경 온 사람에게 수도원투어를 한다는데 나는 그대로 침대에 뻗어버렸다. 일어나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듣는다. 그대로 오후 3시부터 저녁 먹는 7시까지 내리 잤다. 며칠전 그로스글로크너를 넘었을 때 감기기운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날 저녁 캠핑장에서 감기에 걸리지 않기로 다짐했고 실제로 몸살 기운을 뒤로 미뤘다.(나에게 이런 능력이 있다니.) 그 여파가 어제 저녁부터오고 있다.






내가 원래 길을 잘 못찾기도 하는데 수도원 구조가 마치 미로같았다. 길 찾기 너무 어렵다.
아무리 힘들어도 저녁은 먹어야겠다 싶어서 아까 신부님이 소개해주신 곳으로 향했는데 웬걸, 수십명의 검은 사제님들에게 둘러싸여 저녁을 먹었다. 테이블이 가쪽에 길게, 가운데 길게 있는데 가운데 나와 어떤 일반인 할아버지, 돈루이지 신부님 세명이 앉고 양 옆으로 수십명의 수도사님들이 앉았다. 저녁을 먹기 전에 기도문을 외우고 저녁을 먹을 때도 어떤 수도사님이 끊임없이 어떤 책을 낭독한다. 음식은 절밥처럼 소박하고 간소하다. 조리가 별로 되지 않은 음식들. 서로 한마디도 안하고 정색하고 먹기만 한다.
구석에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가서 조용히 먹고 싶은데 내 자리는 정 중앙이다. 루이지 신부님도 나 바로 옆에 앉아서 식사를 하셨다.
먹는 속도도 빠르다. 나는 먹는 속도가 빠른 편에 속하는데 내가 서둘러 먹는 속도와 이 수도사님들이 먹는 속도가 비슷했다. 비교 대상이 없어서 이렇게 밖에 표현을 하지 못하는데 공기의 분위기나 식기류가 울리는 느낌은 마치 고등학생 시절 밤에 소강당에 모여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 느낌을 방불케 했다.



이런 시커먼 남자들 사이에 있는데 어느 누가 안불편하겠는가
딱 이 느낌인데 영어가 아니라 이탈리아어를 쓰니까 느낌이 훨씬 기묘했다.
저녁을 먹자마자 숙소로 돌아가서 그대로 뻗어버렸다.
2025.05.17
수도원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다.
5:00 – 기상 (Alzata)
5:15 – 조과 기도 (Mattutino, 선택적) 개인 성경 묵상 (Lectio Divina)
6:30–9:00 – 아침 식사 (Colazione)
7:30 – 아침기도(Lodi) 및 미사(Santa Messa)
제3시 기도 (Ora Terza)
일 (Lavoro)
12:30 – 제6시 기도 (Ora Sesta)
→ 이어서 점심 및 휴식
15:00 – 제9시 기도 (Ora Nona)
→ 일 or 공부
18:00 – 저녁기도 (Vespro)
19:30 – 저녁식사 및 휴식(Cena – Ricreazione)
20:30 – 밤기도(Compiéta)
→ 이어서 침묵의 시간(Silenzio della notte)
베네딕토 수도회의 모토는 "기도하고(Ora), 읽고(Lege), 일하라(Labora)“
말 그대로 수도사님들은 평생을 이렇게 살아간다.
오늘 7시 반에 아침기도와 미사를 참석했고, 도저히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라 루이지 신부님께 하루 더 머물러도 되냐고 물으니, 수도원장님에게 물어보고는 흔쾌히 허락하셨다.
이런 느낌이다.
아무래도 저번주 Grossglockner 산을 넘으면서 무리를 했는데, 알프스를 빠져나오기까지 내 몸이 억지로 긴장상태를 유지하며 몸을 이끌어오다가 어제의 뜨거운 햇살에 모든 것이 녹아버린 탓일테다. 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채네 아드레날린과 코르티솔 수치가 살짝 높아진 수치였을 건데, 이는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결국엔 언젠가 무너진다.
아침을 먹는 곳에 가서(아침은 다행히 단체로 먹지 않는다.) 커피와 초코우유, 빵, 과일을 조금 먹고 또 숙소로 들어가서 뻗어 잤다. 갑자기 한시반쯤 숙소 안에 전화가 울린다. 조반니 신부님이 점심이 준비되었으니 먹으러 오라고 하신다. 굉장히 민폐를 끼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점심도 어제 저녁과 똑같은 분위기로 먹는다.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환대를 경험해봤고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웜샤워로 대표되는 뜨거운 환대와 절과 성당에서 느낄 수 있는 차갑고 무심한 환대. 전자는 웃음이 넘치지만 기력을 조금 빼앗긴다. 후자는 즐거움은 좀 덜한데 마음이 굉장히 편하다. 둘 다 각자의 매력이 있다. 내가 받았던 환대의 최고봉은 태국 국경 마을에서 웜샤워 호스트에게 받았던 환대다. 뜨겁지만 동시에 마음을 굉장히 편하게 만드는 환대.







여기는 성모 마리아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점심을 먹고 조금 누워있으니 조금씩 기력이 회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푹 자고 나면 내일은 정상 체력으로 돌아올 것 같았는데, 보통 이런 예감은 틀려가는 법이 잘 없다.
이 곳은 놀라울 정도로 마음의 평화를 주는 장소인데, 기회만 되면 일주일 있고싶다. 사실 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개인적으로 존경하는데 프란치스코 수도원에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루이지 신부님은 우리나라 왜관에 있는 베네딕토 수도원에 좀 머문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보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마음이 있으면 왜관에 있는 수도원에 한 번 가보라고 했다. 그러고는 괴이한 표정을 지었는데 농담을 하고 웃는 표정이었을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