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의 답답함과 무질서의 해방감: 알프스를 내려와 이탈리아를 만나다
[유럽 자전거 여행] #29 2025.05.14 구름 덮인 돌로미티를 떠나 해발 70m의 이탈리아 내륙 평원으로 진입합니다. 스위스와 독일의 엄격한 도로 규칙이 주는 답답함을 벗어나, 거친 경적 소리와 눈치껏 건너는 횡단보도가 선사하는 묘한 심리적 해방감을 기록합니다.
2025.05.14
아침에 일어나 일기예보를 확인해보니 이쪽 돌로미티와 알프스 쪽에 구름이 딱 걸려서 정체되어있다. 한동안은 날씨가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산지를 벗어나서 밑으로 내려가면 한동안 맑은 이탈리아 지중해의 날씨가 이어진다.
그래서 알프스를 벗어나 이탈리아 안쪽 내륙으로 진입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약 해발 1,200m 지역인데 오늘 도착할 곳은 해발 약 70m 부근이다. 그렇지만 연속적으로 내리막만 있는 곳은 아니라 오르막도 꽤나 많은 편이다.



산, 도시, 바다, 들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한 특징이 있다. 산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친근하고 해맑게 인사해주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무표정하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환하게 웃으면서 나에게 인사해주었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실시간으로 분위기가 변하는게 느껴졌다. 초반에는 돌로미티 지역 근처에 웅장한 바위산이 있다가 내려갈 수록 마치 우리나라 산과 비슷하게 숲이 우거진 곳들이 나타난다. 여기도 어제 달렸던 옛 돌로미티 철도를 따라 만든 자전거길 La Lunga Via delle Dolomiti와 겹치는 길이었다. 중간 중간에 자전거 전용 터널도 있어서 라이딩이 재밌었다.



자전거 여행자들의 성모







이상한 일이다. 알프스를 빠져나오자마자 누군가에게서 난 향수 냄새가 나에게 묘한 안도감을 줬다.(태국의 기억이 확 살아났다.) 이 냄새를 태국에서 맡았는지 베트남에서 맡았는지 헷갈렸는데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보니 알 것 같다.(아마 태국인 듯 하다.) 나는 작년 12월, 뉴질랜드에서 태국 방콕으로 넘어갔을 때 느꼈던 엄청난 문화충격을 기억하고 있다. 하루만에 모든 면에서 180도 달라진 분위기. 그때의 심리적 해방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정도는 덜하지만 오스트리아 알프스에서 이탈리아의 평지로 넘어갔을 때도 그와 엇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내려오자마자 사람들의 운전이 거칠어지고 경적 소리가 압도적으로 늘었다. 자전거에 대한 안전거리도 잘 확보해주지 않는 편이다. 배려가 줄어든 만큼 자전거의 운전 자유도는 늘어났다. 내가 자전거 도로로 가든 인도로가든 차도로 가든 사람들이 별 신경을 안쓴다. 신호등도 1/3 정도로 그 수가 많이 줄었다. 그러니까 어느정도 눈치로 건널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횡단보도에는 신호등이 굳이 없다는 말이다. 얼마나 편안한가.
단순히 자전거 도로가 잘 정비되어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신호등을 비롯한 도로 규칙을 철저하게 잘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좋은 나라임을 나타내는 지표로 사용될 수는 없다.(이 지표와 GDP의 지표는 꽤 큰 연관성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스위스 북부, 독일, 오스트리아에는 내가 느끼기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규칙이 도로를 지배하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엄청난 답답함을 느꼈다. 끊임없이 내가 규칙을 지키고 있는지 눈치를 보게되는 분위기. 이 나라들은 살짝 뛰는 시늉만 하면 1초만에 건널 수 있는 곳에다가 신호등을 전부 박아놨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앞선 세 나라와 태국 중 어디서 살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태국에 살 거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에게는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남부의 자유로움이 훨씬 좋았다.
이전까지의 유럽 나라들 사이에는 국경을 건넜을 때 아무런 변화도 감지하지 못했는데 여기는 확실하다. 왠지 모르겠지만 국기가 엄청나게 걸려있고 사람들이 진짜 이탈리아 사람 처럼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따뜻하다.



캠핑장에 도착했다. 캠핑장 주인이 다소 특이한 사람이었다. 내 이름과 내 주소를 쓰는데 과장안보태고 5분 이상을 정자로 공들여서 적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come, come 이라고 명령하는 듯한 영어를 자주 쓴다. 베트남 사람들이 You라고 자주 말하듯, 이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을 영어로 직역해서 쓰기 때문에 이런거 같다. 처음에는 기분이 좀 나빴지만 금세 익숙해졌다.